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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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면 소개
위치와 면적 및 인구

거제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둔덕면은 면적 33.78 ㎢ (여의도 면적의 12배),
인구는 2,600명이며 대부분은 해발고도 5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로 구성되어 있어,
비옥한 평지가 적고, 대봉산(大峰山:500m)과 산방산(山芳山:507m)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하둔만(下屯灣)에 이르는 7.2km의 둔덕천 유역에 좁고 긴 충적지가 분포되어 있다.

남쪽과 북쪽은 거제면(巨濟面) · 사등면(沙等面)에 각각 접하며,
서쪽은 한려수도에 접하고 거제대교를 통하여 통영시 용남면(龍南面)과 마주 대하고 있다.

주산업

주산업은 농업과 수산업으로, 농작물은 포도와 표고버섯, 쌀등이 유명하며,
FDA청정 해역에서 생산되는 굴, 멍게, 홍합 등의 양식업과 연안어업의 보고이다.

둔덕면의 역사

역사적으로 신라시대에는 당시 거제의 명칭이었던 ‘ 상군 ’ (裳郡) 치소지가 있었고,
고려시대는 기성현의 치소지가 위치한 거제도의 중심지였으며,
고려18대 의종이 정중 부의 난을 피해 거제 둔덕기성(구:폐왕성- 사적 제509호)에 피난하여
3년간 둔덕에 거주하였다.

한국 연극계의 거목 동랑 유치진선생과 생명파 시인인 청마유치환 선생의 생가가
방하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마기념관은 2008년 4월에 완공되어 많은 관람객들이 왕래하고 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둔덕천,
거제 명산인 산방산, 거제 둔덕기성, 가야. 신라 고분군, 학산 고인돌, 영등오광대등 문화재와
한국 최고의 굴, 멍게를 생산하는 청정해역 등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펼쳐져 있다.

지명유래/마을소개
"둔덕"이란 명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둔덕면(屯德面)은 고려(高麗) 의종왕(毅宗王)이 상하(上下)에 호위군의 주둔지를 두었으므로 이름하였으며
넓은 들판에는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식량을 생산 공급하였다.

둔전
고려시대 군사들의 식량을 생산하던 토지
옛날 옛적 둔덕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불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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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이라 칭하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2年(983) 진주목(晋州牧)에 속하고
동 14년(同14年:995) 산남도(山南道)의 기성현(岐城縣)이라 개칭(改稱)하여 거림리(巨林里)에 토성(土城)을 쌓고 현지(縣址)가 되었으며
현종(顯宗) 9年(1018) 거제현(巨濟縣)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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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毅宗) 24年(1170) 8月 30日 정중부(鄭仲夫)가 숭문주의에 경인난을 일으켜 그 해 10月 2日 왕이 거제도(巨濟島)로 쫓겨와
거제현(巨濟縣)에 3년간 살면서 우두봉(牛頭峯) 중허리에 견내량을 내려보고 기성(岐城)을 쌓았으나 명종(明宗) 3年(1173)
8월에 동북면(東北面 경주:慶州) 병마사(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왕의 복위를 획책하여 경주(慶州)에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시해되자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이라 부르며 1974年 2月 16日 지방기념물(地方紀念物) 제 11호(第11號)로
지정(指定)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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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거제현민(巨濟縣民)은 거창현(居昌縣)의 속현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가니 거제현(巨濟縣)은
없어졌고, 세종(世宗) 4年(1422) 태평성세로 거제현(巨濟縣)의 사등성(沙等城)으로 돌아오니 피난가지 못한 사람은 153호에 423명이였고
논과 밭은 709결(1결(結) 100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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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14年(1432) 거제읍성(巨濟邑城)인 고현성(古縣城)을 쌓고 관하에 7면을 두었으니 둔덕면(屯德面)이라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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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45年(1769) 방리제(坊里制) 실시에 따라 영등(永登), 한산도(閑山島), 하둔덕(下屯德), 산방(山芳), 거림치(巨林峙), 상둔덕(上屯德),
법동포(法東浦)의 7방(坊)을 두었다가 고종(高宗) 26年(1889)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상둔(上屯), 상서(上西), 시목 ( 枾木 ), 마장(馬場),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하둔(下屯), 적도(赤島), 술역(述亦), 신호(新湖), 영등(永登), 어구(於九), 법동(法東), 소랑(小浪)등
15리(里)로 하고 한산면(閑山面)으로 분리하여 산달도(山達島)를 관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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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32年 5月 26日 칙령(勅令) 제19호(第19號)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읍내면(邑內面)을 서부(西部)와 동부면(東部面)으로 분리하고
서부면(西部面)에 소랑(小浪), 법동(法東), 산달(山達)이 편입되었으며, 둔덕면(屯德面)은 옥동(玉洞), 유지(柳枝), 상서(上西), 시목(시木),
마장(馬場),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방하(芳下), 죽전(竹田), 하둔(下屯), 어구(於九), 녹산(鹿山), 술역(述亦), 화도(花島),
학산(鶴山)과 한산도(閑山島)를 다시 편입하여 17리(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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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光武) 4年(1900) 5月 16日 칙령(勅令) 제20호(第20號)로 진남군(鎭南軍) 설치에 따라 한산면(閑山面)이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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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年 6月 1日 경상남도령 제20호에 의하여 상둔(上屯), 시목( 枾木 ),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방하(芳下), 하둔(下屯), 어구(於九),
술역(述亦), 학산(鶴山)의 9리(里)가 법정(法定)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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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年 5月 1日 세계2차대전때 옥동(玉洞), 유지(柳枝), 상서(上西), 시목( 枾木 ),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방하(芳下), 죽전(竹田),
하둔(下屯), 어구(於九), 녹산(鹿山), 술역(述亦), 화도(花島), 학산(鶴山)의 15구제(區制)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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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 12月 26日 제2공화국때 법정리단위 이장(里長) 직선을 하였으나 1961년 10月 1日 제3공화국이 1개리에 2인 이상의 이장(里長)을 둘 수 있어
15개 행정리(行政里)로 환원하였으며, 현재는 마장(馬長), 방답(芳踏), 내평(內坪), 호곡(虎谷), 아사(衙舍)가 분리되어 20개의 행정리(行政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