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섬에서 새가 "사슴아, 호랑이가 널 잡아먹으려 한다."고 울어서 호랑이가 사슴을 못 잡아먹었다는 이야기.
또는 보통 출입시 쓰는 탕건과 흡사하여 탕건바위라 전해오고 있다. 일명
궁모(宮帽)바위 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반드시 궁조를 먹을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전설도 있다.
바위 동굴이며 이 굴과 마주 보이는 덕리 마을에도 이 굴이 보이고 또 이
굴을 건드리면 여아들이 동한다하여 지금은 굴 앞에 나무를 심어 굴이
보이지 않게 했다. 마음 사람들은 이 굴 앞에 심은 나무를 베는 자는
동네매를 맞았다는 전설로 특별히 싶은 나무를 보호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바위 위에 3, 4톤 무게의 적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두들기면 해괴한
음정이 난다하여 무당바위라 한다. 이 바위 20m 위측에 묘가 있는데 그
묘의 자손이 노래를 잘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둥근산인데 갑수대우(甲戍大雨)라 하여 옛 180여 년전 크게 비가 내려
이 거산이 산사태로 구곡이 생기고 그중 성지곡은 그 물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이 물에 몸을 씻어 병을 고친다하여 성지골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수림이 가득차고 물의 흔적을 찾을 길 없다.
광주리에 담아 질삼을 일삼았다 하여 옥녀봉, 돌곳설, 광주리설 등이 있고
발로서 작동하는 방아가 있어 지금의 방아촌이 발을 누르는 곳이요
드들촌은 방아메가 담는 도구요 방아메가 되는 산맥이 있다하여 유명한 지형임을 자랑하고 있다.
둔덕면 상둔리 옥동마을 앞산에 있는 장등산의 정상 부근에 우뚝 솟은 둘레가 50m나 되는 큰 바위가 조각나
지금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는데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한다.
신라시대에는 문화가 번창해 백성들의 생활도 매우 윤택했다. 하얀 광택을 지닌 화려한 옷감인 명주를 선호하는 사회적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해서 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명주를 짜 생활을 해나가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산골짜기마다 뽕나무 잎을 따 누에를 키웠다.
오랫동안 이 마음에 살아왔던 공씨 할머니도 수년 동안이나 산뽕으로 누에를 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흉년이 들어 누에치는 일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무참히 내다 버렸던 누에들이 죽지도 않고 석잠을 자고나서 7일간이나 고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공씨 할머니는 누에들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에 욕심이 생겼다. 할머니는 누가 볼까 얼른 누에들을 치마폭으로 감싸안았다. 이 순간 난데없이 뇌성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할머니의
목숨까지도 순식간에 삼켜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만을 차리다 끝내 목숨까지 잃고만 공씨 할머니를 원망하며 지금도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부르고 있다.
둔덕면 거림리 사람 반윤화는 풍채가 좋아 돈 버는데는 취미가 없고 한량처럼 팔도를 돌아다녔다. 거제도와 영남 일대를 돌며 사기를 쳤는데 한일합방후 왜놈들이
논을 많이 산다는 얘기를 듣고 하루는 아침 일찍 거제반씨 족보를 들고 망건을 거꾸로 쓴채 통영에 있는 세병관(洗兵館)에 갔다. 큰 집이 부잣집이고 논을 반드시
살 것이란 욕심에서였는데 아무도 없어 이상히 여기던 중 마침 일본인 한 사람이 어떻게 왔냐고 묻길레, "거제도 사는 반윤화인데 논을 팔러 왔더니만 논을 살건지
몰라 어딜 갈까 두리번 거리던 중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인이 "그럼 논문서가 있느냐" 고 해서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을 보여주니 "족보 아니냐?" 고 일본인이 말을 하니 "하, 새벽 일찍 나온다고 족보와 문서
를 바꿔 가져왔구나."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인 생각에 족보 정도 부피의 논문서라면 분명 논이 많을 것이고 풍채도 좋은 사람이 그렇게 얘길 하니 믿게 되어 무슨
논이냐 묻자 “청운들이 구름운자다.”고 하였다(옛날에는 하늘천(天), 따지(地) 검을현(玄), 누를황(黃) 하는 식으로 논을 표시했다).
그러자 일본인이 논의 규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는데 "서마지기 단 한빼미인데."라고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6백 평 쯤 된다. "물이 나오는 구멍이 한 구멍,
들어가는 구멍이 한 구멍이고 아주 논이 좋습니다."라고 말하여 일본인에게 논을 팔게 되었다.
그 해 가을 그 일본인이 추수를 위해 논을 돌아보러 반유화를 찾았다. 가 보니 과연 둔덕면 거림리에 실제로 반윤화가 있어 같이 논을 보러 가게 되었다. 그 곳이
지금의 간척지로 현장에 가니 논두렁을 막고 모를 조금 심어 놓고 있었다. 당시는 간척 전이라 해수가 들어와 모가 다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그 이유를
묻자 "모를 심어놓고 해수가 안 들어올줄 알았는데, 또 보완공사를 하려해도 돈도 모자라 올해 농사를 망쳤는데 다음에 추수해 드리겠습니다." 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무리 봐도 안될 것 같아 법원을 통해 지불명령을 했다.
집달리가 와서 차압을 할려고 하니 반윤화가 "차압을 하면 당신들 물건이나 하기 전엔 내 물건이니 손대지 마시오. 내가 농사를 잘 지어 추수를 바치면 될 것인데
농사 못 진 것도 억울한데 차압이라니." 하며 말렸지만 집달리가 말을 듣지않자 "그럼 좋습니다. "며 큰 항아리를 돌로 쳐 깨버렸다. 집달리가 기분이 상해 부엌에
있는 솥에다 딱지를 붙이니 그 솥도 뺏어 깨 버렸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자 집달리가 포기하고 가 버렸다 한다. 이런 식으로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배 고프면
주막에 가서 "밥 한 숟가락만 주시오." 하여 국밥에다 밥을 한 숟가락만 주면 밥만 건져먹고. "밥이 좀 작네요."라 하며 국을 마시고 난 뒤에는 "국물이 없네요."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한 순가락만 달라 했기에 돈도 조금만 주거나 아예 안줘도 되었다. 이렇게 배짱좋게 살았다 한다.
반윤화씨가 망건을 거꾸로 쓴 이유는 어리숙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옛날엔 가짜 어사 노릇을 한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그 방법이 어디서 암행어사가 출두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미리 그 지방의 우두머리에 대한 잘못을
조사해 놓았다가 한 4, 5명이 조를 짜서 굴레박지(마패)를 들고 어사출이야 어사또 출이라 하여 출동하여 빼았으면 한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둔덕면 거림리 농막에 김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은 가짜 암행어사 노릇을 두 번 했다 하는데 주로 한산도 지방에 가서 했다 한다. 어사든 누구든 높은
자리의 벼슬아치들은 일반 주민들이 그 얼굴을 알 수 있지도 않아서 수월했다 한다. 두 번 이상을 못 한 이유는 세 번을 하면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둔덕면 거림리 우두봉 아래 작은 영봉에 있는 목성과 같이 산허리에 테를 두른 성곽을 폐왕성이라 한다. 고려 18대 의종이 정중부 반란 때 축성하였다는 이 성은
둘레가 550m나 되며, 북쪽 성벽은 10m가 넘고 사방에 성문이 있으며 성내는 우물터와 집터의 주춧돌도 있다. 성의 북관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기우제단이 있고
곳곳에 피묻은 몽돌과 기와조각이 나뒹굴고 있어 폐왕이 되었던 의종의 한스런 지난 날을 말해주는 듯하다.
폐왕이 피난와 이 성을 축성했다하나 정확한 기록은 아직 못찾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산쪽대기에 이 거대한 성을 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천태산에 살고 있던 마고할미가 도술을 부려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의종왕이 폐위되어 거제도에 피신하면서 밤낮으로 기우단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태산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니 절강성에 있는 천태산 산신령이 마고할미를 보내 성을 쌓게 했다는 것이다. 마고할미가 성을 쌓기위해 괭이바다에 있는
괭이섬의 돌을 치마에 담아와 하룻밤에 이 성을 쌓고 남은 돌을 우두봉 골짜기에 버렸다고 한다.
거림리에서 폐왕성을 향해 한참 오르다 보면 마치 허물어져 있는 성곽과 같이 작은 골을 메우고 있는 검은색 돌무더기가 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밑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물은 마고할미가 성을 다 쌓고 나니 날이 훤히 새고 소변이 마려워 오줌을 눈 것이 그 근원이라 한다.
마고할미가 괭이바다에서 돌을 가져 오면서 괭이바다 물을 성 안에 솟게 하였다고도 한다. 얼마 전까지도 성 안에 우물에서 물이 넘쳐 흘렀고 그 우물에 명주실
꾸러미를 풀어넣으면 괭이바다 앞에서 나왔다 한다.
이조 문종때 지우라는 대사가 이 곳 삼신굴에서 도를 달기 위해 매일같이 불경만 외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노루 한 마리가 지우대사 석굴 앞에까지 와
지우대사가 불경외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또 지우대사가 기도 정진을 하면 그 옆까지 와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런 생활이
어언 9년이 지났다.
지우대사와 노루는 말이 통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아름다운 초가을날 노루가 일찍 와 지우대사의 불경소리를 듣고 있는 모양이 애처로와 지우대사가 노루를 보고
"말 못하는 짐승아, 전생에 무슨 연이 있길래 9년 동안이나 불경소릴 듣느냐? 너는 비록 짐승이나 불경을 많이 듣고 법문을 좋아했으니 만일 축생의 몸을
버린다면 반드시 인도환생할 것이다.“
그날밤 노루는 지우대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빙빙 돌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3일이 된 아침에 굴 앞에 노루가 죽어 있었다. 지우대사는 노루를 양지 쪽에 묻어
주었다. 그날밤 꿈에 황색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저는 어제 새벽에 죽은 노루입니다. 대사님의 공덕으로 이 산 아랫마을 김아무개 댁 아들로 태어날 터인데
왼쪽 겨드랑이 둥근 점 속에 노루털이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면 짐작하실 겁니다.“
대사가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김 아무개가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노루털이 나 있더란다. 대사는 틀림없다 생각하고 그 아이가 돌이 지나
말을 할 때쯤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이름을 원묘라 지어 주었다. "이 아이는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으니 7살이 되거든 나에게 보내 상자가 되게 하십시오." 해서 그 부모는 그렇게 했다. 원묘는 머리가 영특해 16세에 오계를 받고 대승경전을 두루 읽어 대법사가 되어 굴 속에서 불경에 정진하고 있었다.
세모가 가까운 어느날 험한 산중에 길잃은 여인이 동굴을 찾아와 "스님, 소녀는 지아비가 집을 나간지 오래되어 찾아나섰다 길을 잃었습니다. 굴 밖에서라도 은신
했다 가게해 주십시요."라고 사정을 했으나 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경만 외고 있었다. "여보세요, 스님!" 그제서야 스님은 뒤를 돌아보았다. "스님은 불경만
욀줄 알지, 부처님의 자비와 인간 구제를 모르고서야 어찌 불법을 깨우친다 하겠습니까?" 그제서야 원묘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여인을 들어오게 했다. 정진을
하고 있는 몸이긴 하나 어여쁜 여인과 단 둘이 비좁은 굴속에 있게된 원묘의 마음은 혼란한 생각이 가실 줄 몰라 괴로운 마음으로 불경을 외고 있었다.
밤이 자정을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곤히 자던 여인이 배가 아프다며 뒹구는 것이었다. 해산을 할 것 같다는 말에 눈앞이 캄캄해진 원묘였으나 이왕 엎어진 물이라 어쩔 수 없이 여인이 시키는 대로 수발을 들어 해산국까지 끓여 먹이게 되었다.
드디어 새벽이 왔다. 원묘는 수도는 다 끝이라는 생각에 마지막 예불이나 드리고 떠나자는 생각으로 부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순간 부처님 모습에 서광이
빛나고 굴은 향긋한 향기로 꽉 찼다. 잠자는 여인을 돌아보니 오색구름으로 화해 하늘높이 등등 떠나고 주변은 새벽에 낳은 아이가 연꽃으로 변해 방긋이 웃고
있다.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꽃비가 내린다. 꽃구름 속에 나타난 어제의 그 여인이 "나는 호명보살이다. 너는 머지않아 보살 도를 얻을 것이다. 내가 너를 시험해
보았느니라."하며 꽃구름을 타고 가며 꽃비를 내린다. 산방산 주위와 온 마을은 꽃비가 내려 온통 꽃마을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산을 산방산, 그아랫마을을
산방리라 했다.